골목길의 재단사
Written By. 카프
바둑판처럼 길이 잘 닦인 긴자에도 골목은 있다.
쿠로오 테츠로는 백화점, 명품관, 편집샵, 장인의 공방 따위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일직선의 도로를 분주한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그러니까, 분명히 이 근처였다. 큰 도로에서 한 블록 안으로 들어가면 세련된 레스토랑이나 전통 일식집, 잘 꾸며진 카페나 전통 있는 기모노샵이 보이는 골목. 그 틈새에서 우연히 발걸음이 닿았던 양복점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볼 만큼 훤칠한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럽고 몸에 꼭 맞는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그의 차림새 또한 지나가던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잡아 놓기에 충분했다.
쿠로오는 핸드폰의 지도를 펼쳐놓고 비슷한 골목을 두세 바퀴 맴돌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지형지물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같은 자리였다. 왜 없지?
양복점의 쇼윈도 너머에는 매끈하게 떨어지는 예식용 턱시도, 어두운 갈색의 비스포크 수트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분명히 기억했다. 그 사이에 전시해둔 옷이 바뀌었더라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슬슬 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
“어!”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쿠로오는 뒤로 돌아섰다가 동시에 소리를 쳤다. 내내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재단사였다. 쿠로오 자신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속이 비치는 아카시아 꿀을 닮은 금색 머리카락을 가진 재단사.
재단사는 어딘가 볼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한 손에는 크림색의 튼튼한 쇼핑백을 들고, 다른 손에는 아이스커피를 쥐고 있었다.
“아... 쿠로오씨, 였나요.”
츠키시마가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는 많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야 했다. 간혹 같은 한자를 쓰고 다르게 읽는 고객이 있으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츠키시마씨. 안 그래도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요.”
“...저한테 감사할 일이 뭐가 있으시다고.”
안경 너머로 보름달 같은 눈동자가 두어번 깜빡였다. 츠키시마는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듯 걸음을 옮겼다. 쿠로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하게 맺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가을치고 더운 날씨였다. 늦여름처럼 햇볕이 따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긴자의 골목은 넓고 길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괜찮으시다면 명함을 하나 받아갈 수 있을까요? 왜 지난번에 왔을 때 받아가지 않았는지. 참.”
쿠로오는 츠키시마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그때 츠키시마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당황보다는 정말로 난처함 그 자체였다.
“그게... 제가 명함이 없습니다.”
“예?”
쿠로오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긴자에 가게를 둔 재단사가 명함이 없다고?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조금 귀찮아서요. 세련되게 디자인을 뽑는 것도 어렵고. 대충 만들면 모양 떨어지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주인이 없다는데 없는 거지. 어쩔 텐가. 그러나 쿠로오는 괜히 아쉬웠다. 얼마가지 않아 츠키시마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들고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었다. 이제 보니 쇼윈도에는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이래서 못 찾았구나. 쿠로오는 수긍했다. 양복점은 눈에 띄는 간판도 없었다. 출입문 위에 실과 바늘 모양대로 얇게 엮인 철제 장식이 전부였다. 저것이 간판을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 옷을 그냥 주셨잖아요.”
“그냥 드린 건 아닙니다.”
가게로 들어가면서 쿠로오가 다시 대화를 엮었다. 츠키시마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쇼핑백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근처의 유명한 베이커리 로고가 금박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 아니아니. 그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좀 이상한데.”
가게의 열쇠와 주머니 속의 지갑 따위를 정리하던 츠키시마가 쿠로오를 돌아봤다. 쿠로오는 설명하기 어려운 난제를 앞둔 얼굴이었다.
“당신에게 이 수트를 선물 받고나서 저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꼭 마법처럼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정말로 모든 게 잘 됐습니다.”
쿠로오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점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잠시 말없이 남자를 지켜보던 츠키시마가 느리게 작업대로 돌아서며 대답했다.
“그야, 쿠로오씨에게는 정장이 잘 어울리니까요.”
그게 전부?
쿠로오의 표정이 꼭 그렇게 되묻는 것 같았다.
잘 어울려서? 그게 다라고?
“앉으실래요? 간식을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츠키시마는 안쪽에서 접시와 포크를 두 개씩 가져와 펼쳐놓았다. 쿠로오는 그의 권유대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이지만 어쩐지 츠키시마의 제안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오신 김에 같이 먹죠.”
그렇지, 첫 만남 때도 똑같았다. 그때도 오늘처럼 햇빛이 뜨겁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여름의 초입이었지.